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철학적 물음들이 어떻게 해서 시작되었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 때문에 플라톤 철학이 중요하다.
왜 그럴까? 무엇이든 그것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어떻게 생겨났고 어떻게 여전히 이런 모습으로 존재하는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풀밭에 앉아서 정답게 얘기하는 두 남녀의 모습을 이해하는 데에도 그 근원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마침 말이 나왔으니, 좀 한심했던 모습이긴 하지만 나의 옛날 얘기를 좀 해 보겠다.
나는 대학교 내내 몇 가지 사소한 소원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 중에서 하나는, 우리 학교 위쪽에는 ‘버들골’이라는 넓은 풀밭이 있었는데, 여자 친구랑 둘이 거기에 앉아서 도란도란 얘기를 나눠 보는 것이었다. 물론 대학 4년 동안 여자 친구를 전혀 사귀어 보지 못한 것은 아니다. 단 한 번, 대학 3학년 때 한 석 달 동안 어떤 사람을 사귀었던 적이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손도 정답게 못 잡아보고 우리는 헤어졌다. 그 사람이 “가을에 실려 온 동화”이다.
물론 그 사람과 카페 같은 데 앉아서 다소 정답게 얘기를 나눠 본 적은 많지만, 풀밭에 앉아서 얘기를 나눠 보지는 못했다. 어떤 사람은 풀밭에 앉아서 얘기를 나누는 것이 왜 중요한가 물을지 모르겠다. 그것은 그냥 그걸 꼭 해 보고 싶었다는 말로 대답을 대신할 수밖에 없다. 누구나 그런 것이 있지 않는가. 대단히 어려운 것도 아니고 흔한 것이기도 하지만, 꼭 해보고 싶은 것 하나쯤 마음에 품고 있는 것 말이다.
그랬기 때문에 나는 길을 가다 풀밭에 앉아서 웃으며 얘기를 나누는 두 남녀를 보면 무조건 부러웠다. 겉으로 부러운 척 할 꺼리는 없었지만, 속으로는 많이 부러웠다. 내게는 그들이 모두 서로 사랑하는 연인들처럼 보였다. 그리고 아마도 내 부러움의 큰 부분은 그들이 연인이라는 인식에 있었을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를 갔다 오고 대학원 공부를 하고 … 그러면서 시간이 지나서야 나는 내 눈에 보이는 그런 사람들의 대부분이 사실은 연인 사이가 아니거나, 혹은 연인이라 해도 아주 정다운 연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후로는 풀밭에 앉아 있는 두 남녀가 무조건 부럽지는 않게 되었다.
여러분은 내가 왜 이런 얘기를 늘어놓는지를 쉽게 이해할 것이다. 눈에 보이는 단순한 모습만으로는 어떤 것을
잘 이해했다고 할 수 없다는 뜻이다. 우리에게 아주 친숙한 남녀관계를 이해하는 데에도 그들이 어떻게 알게 되었고 또 왜 서로 만나서
얘기를 나누게 되었는지를 알지 못한다면 단순히 풀밭에 앉아 있는 모습만으로는 오해를 하게 된다. 하물며 복잡한 철학을 이해하는 데에는
더 말할 것도 없이 그 문제의 근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후대로 올수록 철학의 내용은 그 이전의 철학적 업적들의 위에서 출발한다. 이것은 바람직하다. 왜냐하면 옛날 사람들이 한 시행착오를 후대 사람들이 다시 반복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그 위에서 한 발짝이라도 더 나아가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그런데 그 때문에 그 내용만 들여다봐서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예를 들어서 ‘칸트’라는 철학자가 “인식이란 선험적 형식과 경험적 재료가 결합해서 이루어진다”라는 주장을 했을 때, 그가 왜 그런 주장을 했는지 이해하려면 칸트 이전의 경험론과 합리론의 논쟁을 이해해야만 한다. 그건 어떤 이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어떻게 애초에 만났는지를 이해해야만 하는 것과도 같고, 대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질문을 먼저 알아야만 하는 것과도 같다.
철학은 생각에 대한 생각이고, 그래서 질문과 답변에 대한 생각이라는 점에서 생각해도 그렇다. 모든 생각은 질문과 답변으로 이루어지는 대화이므로, 그런 생각에 대한 생각도 질문과 답변으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각은 일종의 답변이거나 질문이다. 혹은 둘 다일 때에도 있다. 플라톤이 이데아론을 제시한 것은, 어디에 객관적인 것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그러면서 또한 그 이데아론을 중심으로 해서 우리 삶의 모든 것,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해서도 답변을 하려 했다.
그런데 사람의 일이란 항상 완전하게 끝나는 법이 없지 않는가. 그래서 그 미진한 부분에서부터 다시 질문이 시작되었다. 예를 들어서 이데아가 영원불변하고 객관적이라는 것은 좀 납득할만하고 하더라도, 그것이 정말 진정으로 존재하는가 하는 것이 미심쩍었고 그래서 그것이 새로운 질문이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에 대해서 답을 했다.
또한 플라톤은 우리가 어떻게 진리에 대해서 아는가라는 인식론적 물음에 대해서도 답했다. 참된 인식은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 아는 것이고 그것은 이데아이므로 이 물음은 이데아에 대해서 어떻게 아는가 하는 물음이 된다. 플라톤은 상기설을 답으로 제시했다. 영혼은 원래 이데아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고 있는데 인간으로 태어나기 전에 망각의 강을 건너면서 잊어먹는다. 진리를 인식하는 것은 이 ‘원래 알고 있던 것’을 다시 기억해 내는 과정이라고 설명한 것이다.
이렇게 플라톤 철학은 질문과 대답으로 이루어져 있으면서 그 전체는 또 내적으로 잘 짜여져 있다. 즉 플라톤 철학은 두 겹의 대화를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지금 설명하고 있는 대목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이런 플라톤 철학 속의 질문과 답은 그 후의 모든 철학자들에 대한 질문이 되었다는 것이다.
후대의 철학자들은 같은 질문에 대해서 플라톤과 다른 대답을 내 놓았거나, 플라톤과 같은 대답을 내 놓으면서
그 내용을 보충했다. 혹은 새로운 문제를 제기했던 철학자들은 플라톤에서부터 시작하는 철학적 문제들을 다루면서 생기는 새로운 문제를 제기했다.
결국 대부분의 철학적 문제들은 그 근원을 따지고 들어가면 플라톤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철학을 공부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 너머에 있는 것을 알고자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 내가 풀밭에서 정답게 얘기 나누는 남녀를 더 이상 부러워하지 않게 되었던 것은, 내가 철학을 공부했고,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 너머의 근원을 알아보았기 때문일까? 사실은^^, 그것만이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그 후에 나도 내가 좋아했던
어떤 사람, 비오는 날 가던 길을 되돌아 와서 내게 우산을 씌워준 어떤 사람과 버들골, 그 풀밭에서 단 둘이 앉아 정답게 얘기를 나누었었다.
얘기만 나눈 것이 아니라 토끼풀로 반지까지 만들어 주었었다. 물론 그 후에 그 사람은 내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손 때
묻은 종이뭉치를 내게 되돌려 주고는 내게 이별을 고했지만 말이다.
그 사람이 내게 되돌려 준 종이 뭉치의 맨 마지막에 이렇게 씌어 있었다.
| …… 내게도 저런 여동생이 있었으면. 이 다음에 애인이라도 저렇게 친절하고 예쁜 사람이 생겼으면. 손을 잡아보고 꾸밈없는 단발머리를 쓰다듬어 보고 싶었지만 아직 우리는 그렇게까지 친하지 않으니까. 내가 너의 단발머리를 쓰다듬어서 거기 씌워진 아픔들을 슬어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멀리서 본 모습과 가까이서 본 모습이 다른 아가씨야. 그것은 아직 가까이서 보이는 슬픔과 아픔들이 삶의 한가운데까지 스며들지 않았음이란다. 슬픔도 기쁨도 반은 자신이 만들어 간다고 사람들은 말하지. 나는 더 많은 것을 자신이 만들어 간다고 믿지만. 소나기 같은 걱정들이 그치면 비 갠 하늘 아래에서 연못 속의 금붕어가 쓰는 시처럼 그 날의 불안한 예감들이 삶을 꾸미는 무늬로만 남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화사한 햇살이 비쳐들면 한 때 잠깐 내리던 비가 들려주던 시의 제목은 뭐가 될까? “비와 함께 내리는 시(詩)”에서. |
그 사람이 ‘비와 함께 내리는 시’였다.
